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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생애 : 라이프찌히시대(1723~1750)

1722년6월에 라이프찌히의 성토마스교회 칸토르로 있었던 유명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가 죽었으므로 시참사회는 그 후임을 찾고 있었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가 후보 물방에 올랐으나 두 사람은 모두 사양했다. 市 참사회는 '가장 우수한 인물을 얻을 수 없으므로 중류급의 음악가로 참아야 한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바흐를 선택했다.
바로 그 몇 개월 전에 바흐는 라이프찌히 시의 의뢰로 BWV245 <요한 수난곡 - St John Passion(1723)>을 작곡했으나 당시 사람들의 평가로는 바흐보다는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를 높이 평가 했다.

1723년2월 바흐는 채용시험을 받고 칸타타 BWV22 <예수께서 사도들을 끌어 당기셨도다 - Jesus nahm zu sich die Zwölfe>를 연주했다.
5월 중순에 취임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어 바흐는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가 되었고 사망하기까지 27년 동안 그 지위에 있었다.
칸토르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교회 부속학교의 음악교사였으나 그 직무는 음악교육에만 머물지 않고 그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할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성토마스와 성니콜라이의 2대 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교회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 금요일에는 대규모의 수난곡이 연주되었다. 따라서 바흐의 생활은 다망하였으며, 1723~1729년 사이에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를 비롯하여 BWV244 <마태수난곡 - St Matthew Passion(1729)>, BWV243 <마니피카트- Magnificat in D Major (원형 BWV243a는 1723)>등을 작곡하였다.

이 라이프찌히시대 초기의 칸타타 들에는 BWV56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 - Ich will den Kreuzstab gerne tragen(1726)>, BWV78 <예수여, 내 영혼을 - Jesu, der du meine Seele(1724)>, BWV80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벽이로다 -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1727~1731)>를 비롯한 수많은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많은 작품은 결코 혜택받은 환경에서 나온 작품들은 아니었다. 우선 바흐는 라이프찌히 전체 시의 음악 책임자인 반면 상사는 시참사회, 성직회의, 대학당국 등 세 분야에 각각 따로 있어서 이 3자가 자주 반목하고 충돌할 때마다 바흐의 활동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또한 라이프찌히의 봉급도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고, 합창단의 능력은 떨어지며 규율도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이었다. 게다가 바흐의 완고한 성격은 자주 상사와의 충돌을 초래했다. 이러한 악조건은 바흐의 교회 음악일에 대한 정열을 차차 잃게 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보이는 것으로 1730년 전후부터 교회음악의 작곡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1730년8월에 시참사회는 바흐의 직무태만을 비난하여 감봉처분을 결정하고, 바흐가 市 참사회에 제출한 교회음악의 개선안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해 10월에 바흐는 젊었을 때의 친구인 에르트만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따한 처지를 호소하며 다른 고장에의 취직을 부탁했다. 이 편지는 <에르트만 서간(書簡)>이라고 불리며 바흐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바흐의 희망은 실현을 보지 못했으며 그는 다른 방면에서 현 상태의 타결을 모색했다.
하나는 1729년부터 1742년까지 대학생 연주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 - Collegium musicum>의 지휘를 맡아 이 악단을 위해 많은 세속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을 작곡했다.이 곡들은 대학의 행사때에 연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주 금요일 저녁에 거리의 커피숍에서도 연주되었다. 유명한 BWV211 <가만히 입다물고,말하지 말아요 "커피 칸타타" - 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Coffee Cantata(1734~1735)">도 커피숍을 위해 쓰여진 곡중의 하나이다.
바흐가 눈길을 돌린 또 하나는 드레스덴에 있는 작센선거후의 궁정작곡가의 칭호를 받고, 그 위력으로 상사위 압력을 배제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드레스덴은 당시의 대음악도시로서, 바흐도 자주 그곳을 방문하여 유행작가 하세의 오페라를 듣거나 교회에서 오르간의 연주를 보여주곤 하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센후에의 충성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즉, 1733년7월에는 BWV232 <미사 b단조(미사통상문) - Mass in b minor>의 첫 부분을 장식하는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헌정한 일 말고도 후나 후비의 탄생축하나 즉위 기념행사 등을 위하여 수많은 칸타타를 작곡했다. 이러한 노력의 보람으로 1736년 바흐에게 <폴란드왕 작센선거후의 궁정작곡가>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라이프찌히의 당국자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 바흐에 대한 노골적인 방해는 줄어들었으나 교회음악에 대한 바흐의 정열은 다시금 타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교회칸타타를 작곡해야할 직무에 있으면서도 그의 작품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734년에 쓴 대작 BWV248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 Christmas Oratorio>도 순수 창작곡이 아니고 대부분이 이전에 쓴 곡들의 패러디였다.

18세기 중엽은 음악분야에서도 크게 양식이 바뀌기 시작한 때였다. 인간의 이성을 믿고, 자연감정을 추구한 계몽사상은 음악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의 매력은 복잡한 대위법 적인 음악으로부터 단순 명쾌한 호모포니로, 그리고 교회음악도 보편적인 양식에서 주관적인 감정표현을 구하는 <다감(多感)양식>으로 급속히 옮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바흐의 음악은 옛 양식의 대표로 간주되어 1737년과 이듬해의 두 차례에 걸쳐 함부르크의 젊은 평론가 요한 아돌프 샤이베의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바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 기교나 대위법의 수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바흐의 작품은 '너무 기교적이며,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교회음악에 전념한 1723년부터 1729년까지를 라이프찌히 제1기로 본다면, 이에 계속되는 제2기는 콜레기움 무지쿰 용의 기악곡이나 세속칸타타에 의해 대표되나, 대략 1736년 무렵부터 바흐의 창작활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여 라이프찌히 제3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간다. 이 시대의 현저한 경향은 이전에 쓴 곡들을 개정하거나 몇가지 작품을 곡집의 형태로 정리하거나 또는 그것들을 출판하는 일이었다.

1726년 이후부터 한 곡씩 세상에 내놓았던 6곡의 파르티타(BWV825~Bwv830)를 한데 묶어 1731년에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1부 - Clavier&uuml;bung Book I>로 출판하였고, 1735년에 BVW971 <이탈리아협주곡 F장조- Italian Concerto in F Major>와 BWV831 <파르티타(프랑스풍의 서곡) b단조 - Partita(Overture in the French Style) in b minor>를 포함하는 제2부가, 1739년에는 BWV552, BWV669~689, BWV802~805의 <오르간 미사>라고 불리는 제3부가, 그리고 1742년에는 BWV988 <골드베르크변주곡(아리아와 30개의 변주) G장조 - Goldberg Variations>이 제4부로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비록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BWV870~893의 <평균율클라비어곡집 제2부>도 여러 시기에 걸쳐 작곡된 곡을 1744년에 정리한 것이며, 이밖에도 오르간 코랄의 개정도 많았다.

1747년에 바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왕의 쳄발로 주자로 근무하던 2남 엠마누엘의 중개로 5월에 포츠담의 유명한 이 계몽군주의 궁정을 방문한다.
왕은 바흐를 환영하고, 바흐도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즉흥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를 동기로 태어난 곡이 BWV1079 <음악의 헌정 - Musical Offering(Musikalisches Opfer)>이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이론가 미쯜러 - Lorenz Christoph Mizler(1711~1778)가 창립한 <음악학협회 - Societ&auml;t der musikalischen Wissenschaften>에 가입했는데, 그때 오르간용의 카논풍 변주곡 BWV769 <높은 하늘에서 나는 왔도다 - Einige canonische Ver&auml;nderungen uber das Weihnachtslied in C Major>를 작곡, 출판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48년부터 1749년 초에 걸쳐 마지막 대작 BWV1080 <푸가의 기법>을 작곡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 상의 3곡은 고도의 대위법 기교를 구사한 난곡으로, 얼핏 생각하면 반시대적이라고도 판단되는 이 경향은 바흐의 만년을 특징짓고 있다.

바흐의 자필로 보아 보면 1746년경부터는 만년 특유의 노쇠함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시력 또한 쇠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1749년5월의 뇌일혈 발작과 함께 그의 시력은 급속하게 감퇴되어 그 뒤로 직접 곡을 쓰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푸가의 기법>이 중단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진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750년3월 말부터 4월에 걸쳐 두 차례의 눈 수술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끝내 바흐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사용하던 약들도 오히려 몸을 쇠약하게 만든 것 같다. 제자 알트니콜 - Johan Christoph Altnikol(1720~1759)과 그의 아내인 바흐의 딸이 바흐의 위급함을 듣고 임지인 나움부르크에서 왔다.
7월18일 무렵에 한때 시력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뇌일혈 발작을 일으켜 10일 후인 1750년7월28일에 바흐는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시간은 오후 8시45분이었다고 한다.
유해는 7월31일 성요한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