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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생애 : 바이마르시대(1708 ~ 1717)

1708년 7월에 바흐는 바이마르에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그가 처음으로 취직했던 추억의 고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낱 악사로서가 아니라 궁정 오르가니스트이며, 그 봉급은 뮐하우젠시대의 2배 가까이나 되었다.

오르가니스트로서의 명성은 높아갔고, 그 작품은 모두가 원숙미를 보이고 있었다. 예배당의 오르간은 바흐 자신의 계획에 따라 개조되었으며, 이 악기에서 그의 오르간곡 태반이 탄생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흐의 바이마르시대를 그의 <오르간곡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훗날의 바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여기서 그가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협주곡을 익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바이마르의 궁정은 엄격한 루터 정통파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당시 독일의 다른 대개의 궁정과 마찬가지로 음악상의 선진국인 이탈리아에의 문호를 열어서, 궁정악단에서는 이탈리아의 협주곡이 자주 연주되고 있었다. 중부 독일과 북 독일의 음악속에서 자란 바흐로서는 그것은 매우 새로운 세계였을 것이다. 그는 그 신선한 매력에 사로잡혀 비발디나, 그 양식에 의한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를 위해 편곡도 하며 연구했다. 그 성과는 바이마르후기 오르간곡에 라틴적 명쾌성이 혼입되어 나타나며, 이어 쾨텐시대에 수많은 협주곡을 낳게 한다.

이 시대의 생활은 잦은 여행도 많았다. 마이닝겐, 카셀, 드레스덴, 라이프찌히 외에도 1713년에는 헨델의 탄생지로 유명한 할레까지 갔던 이유는 성모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희망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의 오르간 연주와 칸타타곡에 감탄한 할레 사람들은 기꺼이 바흐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봉급문제로 바흐와 의견이 맞지 않아 끝내 이 취직은 실현되지 못하고 만다.

바흐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바이마르의 영주는 그의 봉급을 올려주었고, 1714년3월에 그를 궁정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로 임명했다. 이로써 매월 1곡의 칸타타를 작곡하여 연주하는 일이 바흐의 새로운 직무가 되었으며, 1714년 이후의 바흐의 활동은 칸타타에만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뛰어난 종교시인 노이마스터와 프랑크의 가사에 의한 BWV61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 Nun komm, der Heiden Heiland>, 제31번 <하늘은 웃고 땅은 환호하도다 - Der Himmel lacht! die Erde jubilieret>, BWV161 <오라, 그대 달콤한 죽음이여 - Komm, du süße Todesstunde >등의 명작이 태어났다.

바이마르의 바흐는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정도 평안하였던 것 같으며, 교우관계도 원만했었던 것 같다. 1708년부터 4년 동안 아이제나하에서 악사장의 지위에 있던 유명한 작곡가 텔레만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는 바흐의 차남 엠마누엘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특히 친했던 사람은 같은 바이마르지역에 있었던 뛰어난 작곡가겸 이론가였던 요한 고트프리트 발터였다.

이 시기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인 제자도 많았으며, 바흐의 생활은 아무런 불만이 없는 듯 보였으나, 이윽고 이곳과 이별할 때가 다가온다. 그 까닭은 영주와 그의 조카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양쪽에 다 친했던 바흐는 그 사이에 끼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고, 1716년말에 궁정악장이 죽었을 때 그 후임자로서의 직위를 원했던 바흐의 기대가 어긋났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그는 칸타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바흐는 사임 의지가 굳어져있었지만 영주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영주는 끝까지 사의를 고집하는 바흐를 설득하다가 1717년11월6일부터 12월2일까지 명령불복종 죄목으로 구류처분을 내려보내기까지 하였으나 결국 바흐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단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