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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생애 : 쾨텐시대(1717 ~ 1723)

1717년8월에 바흐는 코텐의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바이마르의 사표가 수리되지 않아 실제로 쾨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그해 연말이었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음악가로서는 가장 좋은 지위였는데,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비올라 감바의 명수 크리스티안 아벨이나 수석 바이올린 주자 요셉 시퍼스 - Josef Spiess같은 뛰어난 음악가가 있었으며, 모두 17명의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흐 자신도 비올라를 담당하여 즐겨 이에 참가했으며, 아마츄어의 범주를 넘어선 음악가였던 젊은 영주 레오포르트도 자주 감바와 쳄발로를 연주했다.

바흐의 주요한 직무는 이궁정악단을 위해 합주곡을 쓰고 영주의 방에서 열리는 연주를 위해 실내악 곡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바흐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인 높은 봉급으로 대우했던 영주 밑에서 바흐의 창작의욕은 한층 높아졌던 것 같다.

세속적인 기악곡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수십곡의 세속합주곡이 작곡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그 대부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다만 3개의 바이올린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 빼어난 곡들이 남아서 분실된 다른 작품들의 면모를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곡 대부분은 이 시대의 풍요한 환경과 즐거운 생활을 반영하듯 밝고 즐거운 기분으로 가득차 있다.

바흐는 일찍부터 헨델의 작품을 알고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그 헨델이 런던에서 돌아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1719년10월에 헨델의 고향인 할레에 갔으나 헨델이 그곳을 떠난 뒤였으므로 결국은 이 두 거장은 평생 서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720년에는 영주를 수행하여 뵈멘의 피서지인 카를르스버트에 가있는 동안에 13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바르바라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발생한다. 그 마음의 상처로부터 삶의 전환을 꾀하려함인지, 그 해 10월에 바흐는 함부르크의 교회 오르가니트를 지원한다. 학습시대 때 바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연로한 대가 라인켄의 앞에서 바흐는 오르간의 즉흥 연주솜씨를 보였고, 그 연주의 훌륭함에 감탄한 함부르크의 성직회의는 즉석에서 바흐의 채용을 내정한다. 하지만 이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돈을 기부해야하는 관습이 있었던 관계로, 결국은 바흐보다 유복했던 평범한 음악가가 그 지위에 올랐으며, 바흐는 쾨텐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

나이 35세였던 1721년12월에 바흐는 새아내를 맞이한다. 그녀는 재능있는 소프라노 막달레나로서, 바흐 나이보다 16세 아래였다. 이 막달레나가 바흐의 작품을 사보, 정서한 것도 많은데, 그 필적이 바흐의 것으로 착각될 만큼 흡사하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수가 무려 13명이나 되었는데, 특히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1722년과 1725년에 바흐는 젊은 아내의 애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2권으로 엮은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 Clavier-Büchlein for Anna Magadalena Bach>을 쓴다. 이 곡집에는 <프랑스 모음곡 - French Suits>의 대부분과 사랑스러운 아리아들이 포함되어 있다.

쾨텐시대의 바흐의 생활중에는 교육활동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제자 가운데에서도 특히 풍부한 재능을 나타내었던 이가 바로 장남 프리데만으로서, 1720년1월부터 그를 위해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 Clavier-Büchlein for Wilhelm Friedemann Bach>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2성 및 3성의 <인벤션 - Inventions>의 대부분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 Das Wohltemperierte Clavier(The Well-Tempered Clavier Book)>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걸작이 원래 교육적인 목적을 띄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인벤션>은 1723년에, <평균율클라비어곡집> 제1권은 1722년에 체계적인 곡집의 형태로 완성되었으며, <프랑스모음곡>과 <영국모음곡 - English Suits>은 쾨텐시대에 정리되었다.
협주곡이나 실내악곡과 더불어 이 시대에 바흐는 클라비어 곡을 많이 작곡하고 있는데, 1719년3월 쾨텐 궁정이 베를린에서 성능 좋은 쳄발로를 구입하였던 것으로 보아 BWV1050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제5번 D장조 - Brandenburg Concerto No. 5 in D Major>과 BWV903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d단조 - Chromatic fantasia and Fugue in d minor>등은 이 악기에 자극받아 작곡된 곡으로 추정된다.

쾨텐궁정은 칼맹파이었기 때문에 교회음악을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나 그래도 영주의 탄생일과 새해에는 1곡씩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그 작곡도 바흐의 직무였으므로 상당히 많은 수의 작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거의 유실되었고 현재 남은 것은 3곡의 세속칸타타 뿐이다.
그 가운데에서 <결혼칸타타 - Wedding Cantata>로 알려진 BWV202 <이제 사라져라, 슬픔의 그림자여 - Weichet nur, betrübte Schatten>가 유명하다.

훗날의 편지에서 '쾨텐에서 일생을 마칠 작정이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바흐의 생활은 충만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 후에 바흐는 이 고장을 떠나 라이프찌히의 교회 음악가가 된다. 그 이유는 '교회음악에의 내적 요구'라고 전해지나 바흐 자신은 훗날 자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고 있다.   1)영주가 결혼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는 것
  2)아들이 대학교육을 희망했다는 것(쾨텐에는 대학이 없었음.)
  3)라이프찌히의 경제적 조건이 좋았다는 것
그러나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 결심을 3개월이나 연장했다' 라고.